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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속보도-2]‘백수(白壽)’맞은 윤공희 대주교 ‘삶과 신앙’-‘5·18과 윤공희’

노진표 | 2022/08/24 08:24

윤공희 대주교의 모습

◀ANN▶
(광주가톨릭평화방송) 노진표 기자 =천주교광주대교구 제7대 교구장을 지낸 윤공희 대주교가 올해 99세인 ‘백수(白壽)’를 맞았습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은 한국 천주교 주교 가운데 최초로 백수를 맞은 윤공희 대주교의 ‘삶과 신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윤공희 대주교와 5.18’에 대해 노진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윤공희 대주교는 80년 5월 18일 당시 교구청이 있던 광주시 동구 금남로 가톨릭센터에서 교구의 한 신부로부터 시위를 진압하는 군과 경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사제의 눈으로 본 80년 5월 광주는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인서트-1, 당시 젊은이들을 잡아가면서 발로 차고 태권도하는 식으로 발로차고….많은 사람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군인들이 겁을 주려는 모습이야...>

당시 사제로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 시민들을 보면서 당장 내려가서 응급처지를 하지 못했던 죄책감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괴롭혔다고 회고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80년 5.18민중항쟁의 참상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 D/B>

<인서트-2, 강도를 맞은 사람 옆을 지나가는 제관이 아닌가하는 자책의 소리가 마음에 메아리쳤지만 결국 내려가지 못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5월 19일 행사관계로 서울에 올라간 윤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진솔하게 전달합니다.

그 자리에서 윤 대주교는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며, 광주의 참상을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서울대교구 일부 사제들에게 전달합니다.

<인서트-3, 내가 본 당시 시위 진압 상황을 김수환 추기경과 일부 신부들에게 소상히 전달했어요> 

광주의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자 서울 세나뚜스 25주년 행사 참석과 정의평화위원회 모임을 모두 취소하고 5월 20일 광주에 내려온 윤 대주교는 군인들이 꽉 들어찬 시내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막막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주교로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윤 대주교는 80년 5월 26일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광주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왔던 가톨릭의료원 소속 의료진에게 편지를 맡겼지만, 끝내 그 편지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게 전달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의 의견과 함께 청와대에 전달됐습니다.

<인서트-4, 주교회의 상임회의에서 주교단의 의견을 첨부해 청와대에 전달했어요. 광주의 진상을 꼭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와 함께 윤 대주교는 김성용 신부가 서울로 직접 올라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리도록 ‘특명’을 내렸습니다.

<인서트-5, 김성용 신부를 서울에 보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의 진상을 알리도록 승인을 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 추기경에게 보냈습니다(5․18 특집 대담中)>
 
1980년 5월 22일,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운데)가 도청 회의실에서 수습대책위원회로 활동한 모습. <광주가톨릭평화방송 D/B>

윤 대주교는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뒤 당시 서울수도경비사령부에 있던 군종신부의 주선으로 80년 7월 하순쯤 국보위 위원장이던 전두환씨를 만나 당시 구속됐던 사람들을 모두 사면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김수환 추기경과 사면에 대한 논의 결과 자신이 직접 건의하겠다며 81년 4월 1일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만나 사형수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습니다.

<인서트-6,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사형수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는데 윤 대주교님이 대통령이더라도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며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는데 4월 3일 12시 사면과 관련한 라디오 담화를 듣고 너무나 기뻤어요.(5․18특집 대담中)>
 
윤공희 대주교(오른쪽)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5.18사형수들의 사면을 촉구했다.

윤공희 대주교는 5월 항쟁이 끝난 뒤에도 광주의 아픔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구에서는 이례적으로 81년 5월 10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공동으로 주례한 가운데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광주 시민들의 무죄함과 공수부대원들의 잔혹상을 낱낱이 알리고 진실을 거짓과 선동으로 억누르거나 물리적 폭력으로 짓밟는 것은 바로 인간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며 군사 정권을 성토했습니다.

이와 함께 윤 대주교는 80년 5․18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에 보여준 각별한 사랑에 고마움도 전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당시 서울에 있던 군종신부를 상무대로 보내 군종신부였던 장용복 신부를 통해 구호금 1천만원과 많은 희생없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건넸습니다.

이 일을 두고 윤 대주교는 절망에 빠졌던 자신에게 당시 추기경의 구호금과 편지는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5월 민중항쟁이 비단 광주·전남지역을 넘어 겨레 전체가 하나의 민족적인 시련을 겪은 만큼 그 속에서 교훈을 찾게 되고 그래서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설 때 우리 사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특히,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사회를 이끌려고 욕심을 낼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똑똑히 볼 때 언제나 민심을 존중하는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40여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발포 명령자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민중항쟁으로써 의미를 찾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민중들의 노력이 미흡하나마 평가를 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며 광주 정신이 민족의 정신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의 모습<광주가톨릭평화방송 D/B>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수부대의 참혹하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상처를 입은 시민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줬던 윤공희 대주교의 인간애는 ‘민주화의 큰 족적’으로 영원히 남았습니다.

cpbc뉴스 노진표입니다.

<저작권자(c)광주가톨릭평화방송,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작성일 : 2022-08-23 08:57:02     최종수정일 : 2022-08-24 08: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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